이론 이야기를 열 번 연속 이어오다 보니 어느새 폰트, 좌표, 필압, 장비처럼 조금은 복잡한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읽는 분들도 이제 슬슬 머리가 아프실 것 같아, 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마음으로 제가 왜 이런 장비를 만들게 되었는지 편하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디지털카메라와 DSLR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국내 사진 시장은 상당한 활황기를 맞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나 인공지능 산업처럼 새로운 업체와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던 사람들이 메모리카드에 사진을 담기 시작했고, 인터넷에 사진 파일을 올려 인화를 주문하는 방식도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저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멀쩡히 다니던 S전자를 나와 창업에 뛰어들었습니다. SK의 온라인 사진인화 서비스인 ‘스코피(SKOPI)’ 사이트를 개발한 뒤에는 ‘맥스페이퍼’라는 온라인 사진인화 사이트를 직접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 사업도 쉽게 잘됐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수많은 업체가 한꺼번에 시장에 뛰어들면서 가격 경쟁이 극심해졌습니다. 고객을 모으기 위해 원가에 가까운 가격으로 사진을 출력하는 곳이 생겼고, 심지어 원가보다 낮은 가격을 내세우는 업체까지 등장했습니다. 모두가 가격을 낮추기 시작하자 사진 품질과 가격만으로 경쟁해서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진과 함께 다른 무언가를 보낼 수는 없을까?”
사진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상과 추억을 담은 물건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배송할 때 따뜻한 엽서나 짧은 손편지를 함께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흔한 인쇄 안내문이 아니라, 누군가 펜으로 한 글자씩 직접 쓴 편지였습니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특히 군인 고객들 사이에서 “맥스페이퍼에 사진을 주문하면 위문편지도 함께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소식이 SNS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의 입소문만으로 주문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저가 경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작은 엽서 한 장이 실제로 매출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사진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과 함께 도착한 마음까지 기억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직접 써본 사람은 압니다. 200자 정도의 엽서를 한두 장 쓰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열 장쯤 쓰고 나면 손가락이 굳고 손목이 뻐근해집니다. 글씨는 점점 흔들리고, 펜을 내려놓은 뒤에도 손이 떨립니다. 심한 날에는 그날 다른 업무를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좋은 취지라며 함께 써주었습니다. 하지만 주문이 늘어날수록 손편지 쓰기는 정성이 아니라 고된 노동이 됐습니다. 결국 직원들 모두가 “고객 반응이 좋은 것은 알겠지만, 더 이상은 못 쓰겠다”며 손을 들었습니다.
고객에게는 따뜻한 감동이었지만, 그 감동을 만드는 사람의 손목에는 상당한 부담이 쌓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 그 무렵에는 국내 굴지의 S생명에서도 임직원들이 고객에게 자필서신을 보내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년 동안 발송한 자필서신이 200만 통을 넘어섰다는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던 시대였지만, 역설적으로 기업들은 손으로 쓴 글에서 고객과 연결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쓴 것 같은 손글씨의 느낌은 살리면서, 사람의 손목은 아프지 않게 할 수 없을까?”
문제는 대학원에서 제어를 전공하기는 했지만, 실제 기계를 만들어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S전자 근무할 때도 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주 전공 역시 모터 제어가 아니라 화학공정 제어 분야였습니다.
모터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엔코더는 어떻게 연결하는지, PID 제어는 실제 장비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어떤 모터 드라이버를 사용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제어를 전공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계 앞에서는 완전히 초보자였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구로에 있는 중앙유통단지로 갔습니다. 무엇을 사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부품을 하나씩 들고 다니며 상가 사장님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모터를 컴퓨터로 움직이려면 뭘 사야 하나요?”
“펜을 위아래로 움직이게 하려면 어떤 부품이 필요한가요?”
지금이라면 인터넷 검색 몇 번으로 회로도와 동영상 강의, 샘플 코드까지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관련 자료가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모터 드라이버 하나를 연결하기 위해 설명서를 몇 번씩 읽었고, 배선을 잘못 연결해 부품을 다시 사기도 했습니다. 밤새 프로그램을 고쳐도 기계가 꼼짝하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모터만 멍하니 바라본 날도 많았습니다.
프로그래머가 기계 상가를 돌아다니며 모터와 나사, 드라이버를 하나씩 사 모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도 화면 속에만 존재하던 글씨 좌표가 처음으로 실제 펜의 움직임이 되어 종이 위에 나타난 순간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첨부한 오래된 프로그램 화면과 엽서는 바로 그 시행착오의 흔적입니다. 지금 보면 투박하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당시에는 글자가 종이에 적히는 모습만으로도 밤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질 만큼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사업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손편지를 받은 고객은 좋아했지만, 직접 편지를 쓰는 사람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단순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을 기술로 풀어보고 싶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시화기계유통상가에서 사 온 작은 모터와 서툰 프로그램은 오랜 시간을 지나 지금의 글소담으로 이어졌습니다.
글소담은 손글씨를 없애기 위해 만든 기술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목이 감당하기 어려운 반복 작업은 기계가 대신하
고,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에게 따뜻한 글을 전할 수 있도록 만든 기술입니다.
결국 글소담의 시작은 거창한 기술이나 대단한 사업계획서가 아니었습니다.
엽서 열 장을 쓰고 더 이상 펜을 잡기 어려웠던, 어느 날의 아픈 손목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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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쉬어가기 - 쉬어가기 (손편지 열 장을 쓰다가 기계 만들게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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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6편)
56.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5편)
55.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4편)
54.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3편)
53.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2편)
52.내 글씨체를 손글씨 AI로봇에게 가르치려면 몇 자가 필요할까?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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