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펜, 흰색 한 줄에 숨겨진 과학
검은 종이 위에 흰 글씨를 쓰기까지, 스무 번이 넘는 실험의 기록
글소담은 밝은 색상의 용지에는 일반 펜을 사용하지만,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을 전하고 싶은 프리미엄 제품에는 검은색 용지와 흰색 펜을 사용합니다.
검은 종이 위에 한 글자씩 새겨지는 하얀 글씨는 일반적인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씨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명한 대비와 차분한 분위기, 그리고 펜이 종이에 직접 닿아 남기는 자연스러운 필기 흔적은 글소담이 추구하는 손글씨의 감성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흰색 글씨를 안정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검은색이나 파란색 펜과 달리, 화이트펜은 제조사와 제품 종류, 펜촉의 굵기는 물론 용지의 재질과 표면 상태에 따라서도 필기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같은 펜이라도 어떤 종이에서는 선명하게 표현되지만, 다른 종이에서는 잉크가 고르게 나오지 않거나 글씨가 번지고 끊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글소담 역시 원하는 품질을 얻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제조사와 펜촉 굵기가 서로 다른 20종 이상의 화이트펜을 국내외에서 직접 구매해서 테스트했고, 다양한 용지에서 잉크의 흐름과 발색, 건조 특성, 연속 필기 시의 안정성 등을 하나씩 확인했습니다.
단순히 글씨가 잘 써지는 펜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글소담의 필기 장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펜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실험과 개선을 거쳐, 지금은 만족스러운 수준의 안정적인 필기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화이트펜이라고 하면 캘리그라피나 다이어리 꾸미기, 검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 정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화이트펜의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흰색 안료의 역사부터 잉크의 성분과 구조, 펜촉의 특성, 용지와의 궁합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글소담이 화이트펜을 도입하면서 직접 경험하고 실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흰색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의 역사와 원리부터 실제 필기용 펜으로 활용할 때 마주하게 되는 기술적 제약까지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문적인 내용도 다루겠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사례와 실제 실험 경험을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검은 종이 위에 선명한 흰 글씨 한 줄을 남기기까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이트펜의 이야기와 글소담의 작은 실험 기록을 이제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흰색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 백색 안료의 역사
검정 종이에 흰 글씨를 적는 일은 얼핏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검은 바탕의 색을 충분히 가리면서 미세한 펜촉으로 연속적인 선을 만드는 것은 안료화학과 유체공학이 만나는 문제다.
화이트펜의 역사는 완성된 펜 한 자루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먼저 인간이 불투명한 흰색을 만드는 방법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납으로 만들었던 옛날 흰색 물감
고대 화가들이 사용하던 대표적인 흰색 물감은 납 성분으로 만든 흰색 안료였다.
전문 용어로는 납 성분의 흰색 안료(鉛白, Lead White)이라 하며, 대표 성분인 염기성 탄산납의 화학식은 2PbCO₃·Pb(OH)₂이다. 다른 색을 잘 덮는 성질 때문에 회화와 장식에 오랫동안 쓰였지만, 납의 독성과 변색 가능성 때문에 사용이 줄어들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안전한 대체 안료를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납으로 만든 흰색 가루는 그림에만 쓰인 것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일부 시대에는 얼굴을 더 하얗게 보이게 하려는 화장품에도 납 계열 백색 안료를 사용했다.
얼굴의 기미와 피부색을 덮는 은폐력을 미용 효과로 이용했던 셈이다.
오늘날에는 피부와 신경계에 해로운 납 노출 위험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화장법을 재현해서는 안 된다. (자료: Science Museum Group; Nature Humanities & Social Sciences Communications, 2022)
백색이라는 시각적 경험은 단순히 빛을 내는 것이 아니다. 색이 있는 바탕을 가리는 데 필요한 것은 입사광을 여러 방향으로 산란시켜 뒤쪽 바탕으로 전달되는 빛을 줄이는 능력이다.
안료의 굴절률과 입자 크기, 안료가 들어 있는 매질의 광학 특성이 여기에 모두 작용한다. 따라서 매우 흰 분말이 있다고 해서 펜에 적합한 잉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산화아연과 차이니즈 화이트
18~19세기에는 납의 유해성을 줄일 수 있는 대체 백색 안료가 중요해졌다.
산화아연은 납 성분의 흰색 안료을 대체할 후보로 연구되었고, 19세기 수채화에서는 불투명한 흰색을 표현하는 상품군이 등장하였다.
이때 등장한 차이니즈 화이트라는 명칭은 화이트펜의 직계 제품명이 아니라 회화 재료의 발전사를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
산화아연과 산화티타늄은 모두 흰색 안료로 쓰이지만 굴절률과 분산 능력, 표면처리, 필요한 배합량이 같지 않다. 어떤 소재가 그림에 적합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수성 젤펜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종이 위에 넓게 칠하는 물감과 수백 마이크로미터 폭의 선을 남기는 잉크는 요구하는 점도 범위와 입자 안정성이 다르다.
산화티타늄의 등장과 미세화
20세기에 대규모로 상용화된 이산화티타늄(TiO₂)은 높은 굴절률을 가진 대표적인 백색 안료다.
안료 입자에서 발생하는 광산란은 바탕을 감추는 힘, 즉 은폐력을 키운다. 그러나 원료의 생산 연혁과 특정 펜에 투입되는 실제 배합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현재 판매되는 모든 화이트펜이 반드시 같은 백색 안료를 사용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안료가 미세해질수록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파장보다 지나치게 작은 입자는 가시광 산란의 방식이 달라지고, 서로 뭉치는 문제도 커질 수 있다.
실제 잉크에서는 안료의 평균 입경만이 아니라 크기 분포, 응집체의 크기, 수지와 분산제의 흡착층이 함께 중요하다. 백색 안료의 발전은 단일 물질의 발명이 아니라 입자공학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칠하는 흰색에서 쓰는 흰색으로
수정액·마카·젤펜은 모두 흰색을 남기지만 목표가 다르다.
수정액은 이미 인쇄된 글씨를 덮어야 하므로 두껍고 균일한 막이 중요하다. 화이트 마카는 비교적 큰 유량과 재료 표면에 대한 밀착성이 중요하다. 화이트 젤펜은 잉크를 극히 좁은 틈으로 공급하면서 펜촉이 멈추면 흘러넘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화이트펜의 역사는 단순한 발명 연표가 아니라 연속적인 설계 제약의 역사로 보인다.
흰 안료의 독성, 은폐력, 배합의 안정성, 펜촉을 통과하는 유동이라는 과제가 차례로 전면에 등장한다. 작은 흰 선 하나에 수백 년간 축적된 화학과 기계공학의 질문이 담겨 있다.
연구에서 구별해야 할 세 가지 역사
백색 안료의 발명 시기와 산업화 시점, 특정 브랜드의 제품 발매 시점은 서로 다른 연표에 속한다.
예를 들어 물질이 알려진 시기와 대량생산 기술이 자리 잡은 시기 사이에는 수십 년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
화이트펜의 역사를 설명할 때 이 세 시점을 혼동하면 한 제품의 출시가 특정 소재의 발명인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기술사의 정확성은 유명한 날짜를 많이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날짜가 가리키는 변화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작품 보존과 안전 문제도 중요하다. 납 성분의 흰색 안료은 역사적 안료로 의미가 있지만 독성 때문에 오늘날 가정이나 교육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박물관의 보존 자료와 공개된 회화 안료 표본 사진을 활용하면 직접 유해 분말을 다루지 않고도 안료의 시각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역사를 재현하기 위한 실험과 현대 필기구의 성능시험은 안전 수준과 시험 목적을 달리 정해야 한다.
광산란을 조사할 때에는 ‘반사율이 높다’와 ‘은폐력이 높다’를 별개로 다루어야 한다.
밝은 바탕 위에 얇게 칠한 흰 안료가 높은 밝기를 보이더라도 검은 바탕 위에서는 기저색이 비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두께를 확보한 흑백 바탕 위에서의 반사율 비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 차이를 제시하면 독자는 왜 흰색의 정도를 눈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지 이해하게 된다.
대학원 수준의 서술은 연대기 사이에 작동 원리를 배치하는 데서 시작한다.
납 성분의 흰색 안료의 독성은 재료 선택을 바꾸었고, 산화아연은 대체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TiO₂의 발전은 은폐력과 산업 생산을 확장했다.
이어 분산제와 젤 잉크의 개발이 미세 볼펜촉에서의 필기를 가능하게 했다. 이 단계들은 완전히 직선적인 역사라기보다 여러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가 한 제품에 모인 결과다.
참고 문헌 및 확인 자료
[R1] WebExhibits, Pigments through the Ages: Titanium White. https://www.webexhibits.org/pigments/indiv/overview/titaniumwhite.html
[R2] 첨부 자료, 「화이트펜의 역사와 유래」, 역사 개요 및 연표. 사용자 제공 문서
[R3] U.S. Patent and Trademark Office, Perseverance, thy name is Bette. https://www.uspto.gov/learning-and-resources/journeys-innovation/historical-stories/perseverance-thy-name-b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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